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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가드닝] 씨앗의 선택

가을은 식물이 씨앗을 떨어뜨리는 계절이다. 자식을 대지에 내보내는 파종의 시간이다. 원예 분야에선 그간 봄에 씨앗을 뿌리라고 권했는데, 최근엔 자연에서 일어나는 현상처럼 가을이 더 좋다는 설이 힘을 받고 있다.   그런데 몇 년 전, 이 이론대로 가을에 씨앗을 뿌렸다가 낭패를 본 적이 있다. 겨울을 나고 봄에 싹을 틔워야 하는데 날이 따뜻하자 바로 돋아난 것이었다. 연초록으로 수북하게 올라온 싹이 곧 몰아닥친 겨울 추위를 맞았다. 얼마나 미안하고 안타깝던지. 하지만 다음 해 봄, 반전이 일어났다. 가을의 따뜻함을 참았다가 긴 겨울을 보낸 나머지가 싹을 틔워내면서 화단은 그 어느 때보다 예쁘게 변했다.   식물도 일종의 집단생활을 한다. 같은 씨를 뿌려도 동시에 다 싹을 틔우지 않는데 이건 생존을 위한 전략이다. 우리보다 더 오랜 시간 지구에서 살아온 삶의 지혜기도 하다. 과학적으로는 ‘위험분산(Hedge your bets)’이라고 하는데 경제에서도 같은 용어를 사용한다. 씨앗은 스스로 선택한다. 선봉에 서는 씨앗은 재빨리 싹을 틔우지만 후발대는 차분히 기다려 다른 상황이 오기를 기다린다. 선봉이 유리할지, 기다림이 유리할지는 사실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이걸 생존의 ‘무작위’라고도 한다.   식물의 위기 전략은 농부들에겐 치명적이다. 한번 씨를 뿌리고, 한꺼번에 수확해야 하는데 이게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곡물의 경우 아예 유전적 조치를 취하기도 한다.   해안가에 몰려오는 파도처럼 우리 삶은 정말이지 일없는 날이 없다. 그리고 우린 이 일들 속에 매번 어떤 선택을 한다. 그 결과가 초래한 값에 좌절도 하고 행복도 느낀다. 하지만 선봉에 서서 싹을 틔웠던 씨가 잘못이 없듯 우리의 선택도 무작위로 벌어진 일일 뿐이다. 그저 최선을 다해 생존하였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오경아 / 정원 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행복한 가드닝 씨앗 선택 겨울 추위 위기 전략 시간 지구

2023-11-19

[행복한 가드닝] 관리하기 쉬운 정원

주택 정원은 다목적 공간이다. 꽃 피는 화단과 정든 장독대, 채소나 과일 키우는 텃밭  등 모든 게 필수다. 주거지인 만큼 배수나 급수 기능도 검토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담고도 뭔가 특별하고 아름다워야 하니, 작아서 더 수월하지 않은 곳이다.   그런데 디자인을 의뢰받아 진행하다 보면 상당수 집주인은 ‘관리하기 편한 정원’을 원한다. 그럴 거면 왜 의뢰했을까. 그런 디자인은 어쩔 수 없이 형식화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사계절 색다른 즐거움을 느낄 수 없다고, 은근히 정원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의 게으름을 탓하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 이 마음이 점점 바뀌는 중이다.   가끔 나는 생각해본다. 방송작가를 그만두고, 정원 일을 시작했던 게 정말 정원 그 자체가 좋아서였을까. 아니면 정원을 통해 내 마음의 위로와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을까. 생각을 다져보면 후자가 맞다.   나의 30대는 왜 그리 흙탕이었을까. 까닭 모를 걱정과 불안이 내 속을 휘저어 체한 것처럼 뭉칠 때마다 나는 정원에 식물을 심고, 잡초를 뽑으며 마음을 풀었다. IMF 금융위기 시절, 어쩌다 빚을 내 지은 일산의 거대한 집은 치솟는 이자로 마치 돌덩이처럼 나를 버겁게 했다. 계약직 방송작가의 삶은 바람 불면 떨어질 낙엽 신세 같았다. 내 마음을 간당간당하게 했고, 내 나이 스물아홉, 서른에 연이어 돌아가신 부모님은 끊임없는 되새김질의 슬픔이었다. 이 모든 내 감정의 흙탕을 나는 정원에서 풀고 또 풀다가, 결국 유학이라는 새로운 길로 접어들었다.   그때 정원은 내게 무엇을 해주었을까. 아니 난 그 안에 맘을 던져놓고 그냥 심고, 캐고를 반복했던 듯싶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결국 나를 위한 정원일 뿐이다. 관리가 버거우면 그것도 제대로 된 정원생활은 아니다. 사랑도 정원도 딱 우리가 할 만큼이면 된다. 오경아 / 정원 디자이너행복한 가드닝 정원 주택 정원 그때 정원 계약직 방송작가

2023-09-24

[행복한 가드닝] 도시에 들인 자연

몇 년 전 속초에 강의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했다. 집에서 멀지 않지만 환경은 사뭇 다르다. 설악산 IC에서 오가는 차량으로 4차선 도로가 온종일 소음으로 가득하다. 여기에 작은 강의실을 짓고 소음을 줄이기 위해 자작나무와 측백나무로 건물을 감쌌다. 안쪽으로 몇 평 안되는 정원도 만들었다.   지난해 봄, 양양 오일장에 갔다가 예쁜 흰닭 백봉오골계에 꽂혀서 병아리를 샀다. 남편이 나흘 고생해 닭집을 만들었고, 그 안에서 닭들은 잘 살아줬다. 그러다 수탉도 없는데 암탉이 달걀을 끌어안고 밥도 안 먹고 시위를 해서 유정란을 사서 넣어줬다. 그런데 어머나 세상에! 보름 후 새끼 다섯 마리가 부화했고, 거기에 수탉이 생겨 다시 두 마리가 늘어 지금은 아홉 마리다. 암탉이 낳은 달걀로 아침을 대신할 때가 많다. 거창하게 ‘팜 투 테이블’ 아니냐고 외치며!   요즘 자연으로부터 멀어지기만 했던 도시가 각성 중이다. 런던의 가장 번화한 곳, 피커딜리 서커스에 자리 잡은 포트넘 앤 메이슨 백화점은 옥상에서 벌을 키운다. 꿀이 생산되면 백화점에서 판매도 한다. 뉴욕에서는 1990년대 ‘옥상 텃밭 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맨해튼의 수천여 식당에서 소비하는 채소를 인근에서 키울 수 있을까”라는 고민에서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이 텃밭에 들어선 옥상 식당은 늘 줄을 선다. 건물 대형 유리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을 이용해 창문에 화분을 걸어 채소를 재배하는 ‘윈도 파밍’도 유행이다. 게다가 이제는 벌레를 쫓는 것이 아니라, 도시로 돌아오라고 집터를 마련해주고, 작은 동물이 쉬어갈 수 있는 쉼터도 만든다.   나는 도시를 탈출했지만 모두가 이럴일도 아니다. 도시에 자연이 들어갈 수 있는 틈을 열어주면 된다. 그 틈으로 멀어진 자연이 성큼 돌아와 준다. 창가의 작은 화분으로도 그 시작은 충분하다. 오경아 / 정원디자이너행복한 가드닝 도시 자연 요즘 자연 옥상 텃밭 옥상 식당

2023-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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